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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한계시록 21장 9절- 22장 5절에 언급된 새예루살렘에 대하여

by 독거할매 2021. 3. 30.

요한계시록 21:9-22:5에 언급된 새 예루살렘에 대하여

Ⅰ. 서론

요한계시록 21:9-22:5절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주제로 한다. 의의 백성에 대한 최종적 운명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본문은 이 새 예루살렘을 크게 두 단락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단락은,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관하여(1-8절), 두 번째 단락은 완전케 된 구원받은 공동체에 관하여(9-27) 구성되어 있다. 본 소논문에서는 본문 구조와 내용 연구를 살펴봄으로써,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언급된 새 예루살렘의 의미와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문 구조

 

  1.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새 예루살렘(21:1-22:5)1.1.1. 이중 환상(21:1-2)
    1.1.2. 천사의 음성(21:3-4)
    1.1.3. 하나님의 음성(21:5-8)
  2. 1.1.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21:1-8)

1.2. 완전케 된 구원받은 공동체(21:9-22:5)

1.2.1. 새 예루살렘에 대한 개략적 묘사(21:9-14)
1.2.2. 건축물들의 치수(21:15-21)
1.2.3. 새 예루살렘 안에서의 삶 묘사(21:22-27)
1.2.4. 에덴동산과 비교되는 새 예루살렘(22:1-5)

 

Ⅲ. 본문 내용 연구

  1.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새 예루살렘(21:1-22:5)
  2. 1.1.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21:1-8)
    두 음성은 이중 환상에 관해 언급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처음 부분(곧 하나님의 새 창조)을, 천사의 메시지는 둘째 부분(곧 새 예루살렘의 출현)을 설명한다.

1.1.1. 이중 환상(21:1-2)

본문의 주된 논점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다. 새창조가 존재하는 만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되는 ‘갱신’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지금 존재하는 만물을 제거하고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재창조’를 통해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논란은 학자들 사이에서 지속되어 왔다. 유대 사상 속에는 이 새 질서에 대하여 두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하나는 현제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고 사실상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로 창조된다는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땅이 쇄신되어 이상적인 상태로 변모된다는 관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 질서와 새 세상이 현재의 세계와 비슷한 질서를 가진 물리적 실재의 한 형태가 될 것인지, 어떤 형태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새 창조는 재창조의 그림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에 연속성이 없다면 이 세상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창조의 표현을 이야기해도 무방할 정도의 새 창조이다.


본문에서 ‘하늘’은 우주공간의 하늘이 아니며, 하나님의 존재의 영역을 지칭한다. ‘바다’는 요한계시록 전체 본문에서 지속적으로 살펴보았듯이, 악을 상징하고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은 신부와 하나님의 도성으로 상징된다(21:10 3:12). 어린양의 신부는 19:7, 9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면서 교회가 된다.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는 것은 우리가 내려온다는 것이다. 바빌론과 음녀의 이중 상징과 대조적으로 보이고 있다. 악의 세계와 의의 백성들이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보게 하는 그림이다.

 

 

1.1.2. 천사의 음성(21:3-4)

3절의 핵심단어는 ‘거하다’ 일 것이다. 라이트는 본문의 ‘거하다’는 단어를 요한복음 1장과 연결하여, 말씀(Word)이 육신이 되어 사셨고, ‘거하셨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고, ‘성막을 세우셨던’ 예수님 안에서 하셨던 그 일을 이제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범위에서 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로 오셔서 치유와 위로, 기쁨의 임재로 영원히 사신다고 표현한다. 하늘과 땅은 예수님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었다.

 

4절은 하나님과 교제의 완전한 회복의 결과를 서술하고 있으며, 미래에 일어날 이 일은 이사야 25:8에서 나온 예언의 성취가 될 것이다. 긴장과 위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 죽음도 고통도 슬픔도 없는 세계가 소개된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회복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제거되었다. 죽음은 불 못에 들어갔다. 죽음이라는 것이 생명학적인 의미가 아닌 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의 세력, 그런데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는 세상이다.

 

1.1.3. 하나님의 음성(21:5-8)

본 단락에서는 최종적으로 임한 새 피조세계 주제가 계속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부분은 1:8절과 여기 두 곳으로써, 이사야 43:19의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이는 고린도후서 5:17에서 바울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사야서의 성취의 시작을 보았다.

 

요한은 우주적 차원에서 그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새 창조와 재창조는 개인의 부활한 모습과도 직결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이자 주님이기 때문에 미완성인 채로 놔두시지 않는다. 알파는 하나님의 창조를 상징, 오메가는 그 모든 창조가 새로워지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시작하신 분이 끝을 맺으신다는 의미를 갖는다. 창조의 목적을 종말에 이루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핵심은 생명이다. 새 창조의 중요한 특징은 죽음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7절은 새 창조의 그림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생명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 짐승의 공격 앞에서, 우리의 이마에 그리스도의 인을 받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남아있는 자들이 바로 유업을 받게 된다. 새로운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된다. 그는 내 아들이 된다.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신다. 하나님과 오직 외아들인 예수님과 배타적인 관계를 넘어서 이제 내가 하나님과 아들이 되는 그 특권을 누리게 된다.

 

이 환상 단락은 어떤 새로운 내용을 더해주기보다는, 21:1-8에서 언급된 내용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새예루살렘의 특징의 하나는 성전이 없다.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말했던 성전의 실체임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굉장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에 대한 애국심과 자신들의 국가적이고 종교적인 중심으로서 그들이 아직도 고대하고 있는 도시를 향한 충성심, 상징적인 중심으로서 그리고 로마를 대신할 수 있는 영적인 중심으로서의 의미를 예루살렘은 가지고 있었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는 구약 전통의 많은 요소들을 함께 엮어 그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가운데 백성들이 살아가는 한 장소의 이미지를 일관적이고도 충분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1.2.1. 새 예루살렘에 대한 개략적 묘사(21:9-14)

본 단락에서는 거룩한 성이 최초로 등장한다. 9-10절은 바벨론을 소개한 17:1-3절과의 거의 동일하다. 두 묘사의 평행 관계는 9-10절에서 신부에 대한 묘사가, 바벨론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문자적인 묘사가 아니라 상징적인 묘사라는 것을 암시한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그 성의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다(11절). 그리고 성에는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들이 있으며, 문들 위에 구약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다(12절). 성곽의 목적은 방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는 데 있다고 오즈번은 말한다.

 

13-14절의 새 예루살렘 성의 열 두 문이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가운데 동등하게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열두 기초석에 어린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14절), 송영목은 사도는 신약 교회의 터이며, 15절의 성곽을 측량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로 인침과 보호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1.2.2. 건축물들의 치수(21:15-21)

본 단락에서 이러한 측량의 행위는 새 예루살렘의 건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곧, 이러한 측량의 행위는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보호가 함께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 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장소인 성전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서 그 도시 자체가 하나의 성전이 된다. 이미 언급된 특징들뿐만 아니라 이것에 관한 가장 놀랄만한 증거는 그 도시가 완전히 네모반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6절).

 

오즈번은 에스겔서 42장 15-20절과 45장 2절에서 성전 건물의 규모는 너비와 길이가 똑같이 500규빗인데, 그 목적은 “여호와의 거처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고도의 신학적 및 영적 이상을 반영하는데” 있으며, 본문에서도 비슷한 목적이 의도된 것으로 보았다.

 

보쿰도 요한이 근거로 삼고 있는 선지자적 자료들에서보다도 더욱 성전을 철저히 빼어 닮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의 주제가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 개념 전체에 있어서 얼마나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새 예루살렘에 존재하는 보석은(19-21절)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석은 전체적으로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의 영광, 순결성, 아름다움 그리고 소중성”을 나타내 준다. 보석 모티브는 새 예루살렘과 성전과 에덴을 서로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이것은 모든 구속사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기대되어 왔던 성전과 에덴의 궁극적 실체가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보석을 새 예루살렘의 건축적 구조물에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의해 상징되는 교회 공동체는 새 창조인 에덴의 회복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며 성전 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1.2.3. 새 예루살렘 안에서의 삶 묘사(21:22-27)

본 단락은 영원한 성에서의 삶의 특징이 될 거룩함, 영광, 기쁨을 먼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되신다는 것을 말함으로 시작한다(22절). 그것은 바로 새 예루살렘은 문자 그대로 건축물로 새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 곧 교회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묘사해 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 가운데 건물로서의 성전이‘없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신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되신다고 한다(22절 하반절). 그렇다면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는 것이지 성전 자체이신 하나님 자신이 성전 되심으로 성전은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건물 성전이 없을 뿐이다.

 

23절에서 새 예루살렘은 해와 달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실제로 해와 달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얼마나 강력하게 새 예루살렘을 압도하고 있는가에 대한 과장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4-26절은 이사야 60장의 인용으로, 요한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으로 만국이 순례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가 자신의 눈앞에 놓여 있는 미래의 새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만국이 하나님의 마지막 때 임재 앞에 경배하는 자로 나아오며, 모든 존귀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거룩한 성은 공간적이지만 전달된 의미는 비공간적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 장면의 요점은 믿는 이방인은 하나님의 임재에 다가가는 것이 영원히 열려 있고 어떤 악도 그들의 접근을 위협할 수 없으며 거룩한 성의 빛에 따라 행하는 자는 신분상 성 자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1.2.4. 에덴동산과 비교되는 새 예루살렘(22:1-5)

본 단락은 21장 전체의 결론이면서 21:1-7에 소개된 새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요한은 1-3절 상반절에서 에스겔 47장 1-12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에 흐르는 강의 모티브를 사용한다. 그러나 에스겔서와 본문이 묘사하는 강물이 모두 치료하는 효험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에스겔서에 나오는 강물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원하여 땅을 비옥하게 하지만, 본문의 강물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와 온 세상을 향해 흐르며 풍성한 결실을 준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즉 생명수 강의 발원지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3절 하반절에서 5절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축복으로써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직접적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들이며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는 왕들이다.

Ⅴ. 결론

우리는 새 창조 주제가 21:9-22:5을 지배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새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완전케 된 구원받은 그의 백성, 공동체이며, 새 예루살렘에 의해 상징되는 교회 공동체는 새 창조인 에덴의 회복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며 성전 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모든 성도들이 가까이 접근하실 수 있는 분으로 통치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기대했던 바, 임마누엘의 성취를 이루신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완전한 교회의 완성된 영광 속에 참여할 수 있도록 현세에서 타협을 부추기는 시험 앞에 인내하고, 악의 세력과 싸우며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하겠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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